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평 문씨 (문단 편집) == 역사 == 시조 문다성은 역사적 인물이라기 보단 설화적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삼국시대 인물이라면서 시대가 안 맞아 손쉽게 후삼국시대 인물로 바꿔버렸다는 것 자체가 교차검증 자체가 불가능한 허구의 인물이기에 가능한 이야기이다. 따라서 시조단을 만들어 종중에서 제사를 지내지만 시조 밑으로는 자료가 없으므로 대수를 정할 때는 중시조 [[문익(고려)|문익]](文翼)을 1대로 쳐 계산한다. 문익은 [[숙종(고려)|숙종]] 대의 인물로 고려시대 [[문공원]]의 금석문에 등장하는 최초의 실존인물이다. 문다성부터 문익까진 꽤 족보가 먼 편이다. 문익의 아버지는 2군 6위 소속의 무관이었고 문익은 [[중서문하성]]의 관직을 거쳐 문관이 되었다. 문익의 세 아들 [[문공인]], [[문공원]], 문공유 삼형제의 등장으로 가세가 매우 크게 성장했다. 문공유는 남평현 [[자작(작위)|개국자]]로, 문공인은 평장사로, 문공원은 [[배향공신]]이 되었다. 이 기세로 [[무신정권]] 대에는 매우 잘 나가 [[문벌귀족]] 가문 중 하나이기도 했다. 고려 때의 대표적 인물로는 무신정권 때의 네임드급 문신 및 무신인 충숙공 [[문극겸]]이 유명하다. 딸이 [[이의방]]의 제수다. 이의방의 동생 [[이린(고려)|이린]]의 아내. 즉 문극겸이 장인, 이린은 사위이다. 이린과 문극겸의 딸의 6대손이 [[이성계]]이다. 그리고 고려 말의 목화씨로 유명한 [[문익점]]도 유명하다. 초명은 익첨(益瞻). 현 [[제주도]]에 있었던 [[탐라국]]의 최고 권력자인 성주(星主)를 세습하던 고씨와 연합해 성주의 권력을 넘보던 왕자(王子)를 세습하던 제주 양씨를 밀어내고 남평 문씨가 약 400년간 왕자를 세습하기도 했다. 여기서 뜬금없이 남평 문씨가 등장하는 이유는 제주 고씨의 탐라 서쪽 지역이 동쪽의 제주 양씨에게 위협받자, 육지의 세력인 고려의 중앙정부 귀족들과 권력적으로 연대하려 했기 때문이다. 당시 고려는 무신들간의 다툼으로 혼돈의 상태에 놓여있었기에, 무신들에게 잘못 줄을 대었다가는 역으로 숙청될 위험이 높았다. 따라서 문신 출신이면서 무신들과 가깝고, 또한 지리적으로 제주도에 가까운 남평(나주)의 문씨가 정치적 차선적으로 선택된 것이다. 고려사절요 제14권에서 제17권 그리고 씨족원류에 따르면, 제주 고씨는 탐라에서의 지위를 지키고자 재상이자 상장군이었던 문극겸에게 지속적으로 접촉하였고, 문극겸의 아들들인 문후식, 문유필때 되어서야(고려 고종시기) 군사를 보내어 제주 양씨를 축출하고 제주 고씨는 탐라의 서쪽, 남평 문씨는 탐라의 동쪽으로 함께 권력을 분점했다. 그 결과, 제주 고씨는 고려의 중앙정부와 연줄을 대고, 지속적으로 성주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고, 남평 문씨는 약 400년간 탐라의 동쪽을 안정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다. 다만 조선조 때에는 별로 가세가 흥한 편이 아니어서 조선조 때의 유명한 인물을 찾아보려면 대충 의병장이니 그저 그런 관료가 나올 정도다. 아마도 현 족보상 대단히 중요한 위치에 있는 문익점이 여말선초에 고려 라인을 타다가 배제당했던 듯하다. 그나마 [[목화]] 버프로 사후 공신은 됐지만 중앙 정계에선 멀어져서 당장 그 아들만 해도 빈곤해져 문익점의 동문인 권근이 태종에게 문익점 아들에게 벼슬 하나 주라고 했을 정도. 오히려 현대에 들어 [[문재인]] 대통령을 배출하고, 제20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에 [[문희상]] 의원이 당선됨에 따라 [[의전서열(대한민국)|국가의전서열]] 1, 2위를 모두 남평 문씨에서 차지하는 등 더 잘나가는 양상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